동래정씨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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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야공 묘지(僕射公 墓誌)

 

조산대부 검교예빈경(朝散大夫 檢校禮賓卿)으로 행섭대부경(行攝大府卿)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下賜)받은 형양 정공(滎陽鄭 公)의 휘는 목(穆)이요 자(字)는 없으며 동래 인(東萊人)이다. 할아버지 휘 지원(之遠)은 군장(郡長)이었으며 아버지 휘 문도(文道)도 군장이었다.

 

公이 18세(高麗文宗 11년 丁酉-1057년)에 어버이 곁을 떠나 유학하면서 매우 애쓰고 노력하여 뜻을 무난하게 이룩했다. 1066년(文宗20,丙 午)에 성균(成均) 시험에 합격하여 그 명성이 떨쳐 빛남이 훌륭한 선비들과 더불어 이름을 가지런하게 하니 이 무렵 과거(科擧)에 뜻을 둔 사람들이 한결같이 부러워 하더라. 검교장작감인 광릉(廣陵)의 고익공(高益公)은 公의 영특함을 듣고 자못 公을 아끼어 1071년(文宗25,辛亥)에 사위를 삼았다.

 

그 이듬해 봄에 성고(聖考:죽은 임금을 가리킴) 문종(文宗)께서 친히 광전(廣展)에서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이는데 「고요한 물에 비친 그림 자(止水鑑形)」라는 시제(詩題)와「공자는 백왕의 스승(仲尼爲百王師賦)」이라는 부(賦 :詩歌체의 하나)의 글제를 내셨고 이때 임금께서 미리 지은 시(詩)에 이르기를 「낮에는 천자(天子)의 태양을 엿보고, 밤에는 서민의 별을 잉태 한다(晝窺天子日 夜孕庶民星)」라고 하는 구절이 있었는데 公이 영특한 선비들과 더불어 함께 과장(科場)에 나아가 글을 지어 올리니 임금의 어제(御製)와 公의 시(詩) 한 구절이 서 로 같았다. 이에 임금은 더욱 감탄하여 公을 병과(丙科)에 급제시켜 비서성 교서랑 동정(秘書省校書郞同正)에 임명하시니 사판(仕版:관리 의 명부)에 이름이 기록되매 명망이 높아지고 세상에 드러났지만 문무백관을 자주 만날 때 한결같이 화기(和氣)롭고 믿음직하며 오만하거 나 뽐내지 아니 하였으며 마침내 公을 시기하는 자가 생겨나지 아니했으며 일족들 사이에도 이간질 하는 말이 없었으니 이는 모두가 公이 낙이(樂易: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운 모양)한 성품과 심후한 덕행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1076년(文宗 30,丙辰)에 군기주부(軍器主簿)로서 고주통판(高州通判)이 되었고 임기가 끝나 가족을 거느리고 서울로 상경하니 지금의 정승 인 위계정(魏繼廷)과 윤관(尹灌)이 公과 더불어 권세와 위계를 넘어 교제를 하였다. 이로부터 公이 이따금 집무실에 나가 이분들을 만나면 반드시 예절로 상대하여 환담을 나누고 지기지우(知己知友)를 삼았다. 公은 일찍이 벌레가 목숨이 온전한 것은 독이 없기 때문이요 나무 가 고목(古木)이 되도록 오래 사는 것은 재목이 못된 탓이라(蟲全性命因無毒, 木得千年爲不材)는 시구(詩句)를 늘 외워서 여러 아들을 깨우 쳤고 또 시(詩)를 지어 그들을 타이르되.

 

「아이들에게 말 하노니 현달하여 조정에 오르는 길 같지 않구나,

관리가 되려면 방두(房杜)의 학술을 준수할 것이며,

남들을 가르치려면 공희(孔姬)의 풍도(風度)를 연구하여,

가정에 있어서는 반드시 효도를 할 것이며,

나라를 위하려면 반드시 충성을 잊지 말아야지.

너희가 나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이세상을 살아가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요.」라고 하였다.

 

1084년(宣宗 1年,甲子)에 영청현(永淸縣)의 수령(守令)이 되었는데 그 해 전국적으로 가뭄이 심하여 백성들은 살 길이 없어 굶주려 죽음에 빠지게 된 자가 이따금 있었다. 公이 부임한지 몇 달이 채 안되어 그 고을의 서쪽 넓은 들판인 덕지원(德池原)이 들불(燎火)에 다 타버리니 처음에는 백성들이 두려워했는데 마침 그 해에 보리와 벼가 풍년이 들고 심지 아니한 피(稗)가 불탄 자리에 저절로 자라 풍작을 이루었으 므로 公이 사람들을 시켜 수확하여 50여석을 군량미로 비축하였으며 또한 백성들이 거두어 들인 곡식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많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겨울에 이르러 요국(遼國)의 봉책사(封冊使 :王侯에 보하는 뜻을 쓴 天子의 詔書]가 고려 조정으로 오다가 그 일행이 현(縣)의 동쪽 영덕역(迎德驛)에 숙소를 정하게 되었다. 公은 현(縣)의 아전을 거느리고 영접하는데 예를 갖추어 대접을 후하게 했더니 요인(遼人)들이 이르기를 이 고을은 영청(永淸)이 아니라 영성(榮城)이다 라고 칭찬하니 그 때 접반사(接伴使)[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관원] 인 소태보(邵台輔)가 조정에 포상을 천거하여 사관(史官)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영청에 끼친 덕이 너무 커서 20여 년 동안이나 그 고 을 백성들의 선물 꾸러미가 연달아 끊이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한(漢)나라 양호(羊祜)의 남은 발자취를 소중히 여긴 까닭이니 어찌 영청 고을 백성들이 고개 위에 비석을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公이 선종실록(宣宗實錄) 한 권을 편수하였는데 정본은 사관(史館)에 붙이고 그 초고(初稿)는 집안에 전해진다. 1093년(宣宗10,大安 9)에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되었다. 그 해 봄과 여름에 동계(東界) 백성들이 흉년에 굶주리게 되자 선종(宣宗)은 公에게 봄과 여름으로 순서에 따라 번갈아 드는 동북면 병마판관 갑장별감(東北面兵馬判官甲仗別監)을 제수하고 겸하여 고주, 화주, 장평, 영인, 흥원, 현덕, 정변, 등 7개 군을 선무(宣撫)하게 하니 公은 쌀 1,870여 섬과 소금 310여 섬으로써 가난하고 의탁 할 곳 없는 백성 9,909명을 구제하고 나서, 「내가 비록 나라의 비축물(備蓄物)로써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으되 백성에게 주어진 혜택이 적지 아니하다.」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안되어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고 금주자사(金州刺史)로 나가게 되니 그 곳으로 부임할 무렵 시골 친구들이 알려 주기를 「금주(金州)에는 받드는 신(神)들이 몇 백 위(位)가 되고 위령(威靈)이 드세어 사람을 해코지 함으로 이제까지 매번 자사(刺史)가 부임하여 그 달을 넘기지 못하여 아주 모진 벌을 받았다.」라고 하니 이 말을 들은 가족들은 모두 두려워서 밤낮으로 돌아가자고 졸라도 公은 예사롭게 여기고 태연히 말씀하되「귀신이란 총명하니 사람이 곧고 바르면 함부로 해코지는 못할 것이다.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아라.」라 고 하더니 公이 부임함으로부터 三년이 되어도 아무런 재앙이 없었고 나라에서 불러 좌습유(左拾遺)에 지제고(知製誥)로 임명하였으니 이 는 公이 정직하여 신이 도와준 것이 분명하다.

 

다시 여러 번 벼슬자리가 옮겨져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이르렀는데 조정에서 근무 중에 조금도 흐트러진 빛이 없었으며 좌우를 도움에 곧은 정성으로 마음과 힘을 다하면서 삼가고 조심하여 자신을 바로잡으니 그것은 公이 끝내 지조를 지킴에 그릇됨이 없었다 할 것이다. 1097년(肅宗2년 丁丑)에 또 기거랑(起居郞)에 임명되고 그 해 가을에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동하여 친림(親臨)하시어 나라 안의 죄명을 정(定)할 때 재상(宰相)과 근시(近侍)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했는데 公이 홀로 의젓하게 붓을 잡고 궁전 대뜰 위에 서서 임금의 말씀을 곧 게 받아쓰니 이 또한 옛적 사관(史官)이 삼가서 기록하던 직분이라 하겠다.

 

다시 벼슬자리가 여러번 옮겨져서 형부(刑部)와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이르니 매번 녹봉을 받는 날에는 내외 친척과 이웃의 가난한 사람 들에게까지 혜택이 고루 미치었으니 이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나누어 준 곡식만도 35섬이나 되었다. 그러므로 마을 사람들이 이 일을 매우 고맙게 여겨 추렴을 하여 불공을 드리면서 길가에 등불을 밝히고 公의 수복(壽福)을 기도했다. 그리고 1105년(肅宗10, 乙酉) 봄에 또 三품 관에 임명되었으나 公은 수년 이래로 신병이 낫지 아니하여 계속 치료를 했지만 이 해 三월에 이르러 병환이 위중해졌다. 둘째 아들 점이 옆에 뫼시고 근심하는 빛이 있거늘 公이 이르기를「도가 행하여 지려는 것도 운명이요, 도가 무너지려 하는 것도 운명이니 너는 무슨 걱정 을 하는고.」하더니 1105년 5월 19(乙卯)일에 용흥사 덕혜원에서 세상을 버리시니 그 달 25(辛酉)일에 불교의식에 따라 이 절의 서쪽 언덕 에서 화장(火葬)하는데 그 장례의 절차가 성대하고 법도에 맞지 아니함이 없었다.

 

6월 5(庚午)일에 화장한 유골을 거두어 서울의 동북쪽 안 불사(安佛寺)에 임시로 봉안했다가 그 해 10월 9(癸酉)일 권지태사감후(權知太史監侯) 곽자인(郭子仁)이 좋은 묘터를 잡았다 하므로 10월 20(甲申)일 새벽에 아침에 홍호사(弘護寺) 서남쪽 언덕에 안장(安葬)하니 춘추(春秋)는 66세이다.

 

아들 넷을 두었으니 맏이인 제(濟)는 이술(吏術=관리로서 일 처리 능력)로써 벼슬길에 나서서 지금은 위위주부(衛尉主簿)로 영광군통판(靈 光郡通判)이며, 둘째 점은 위위주부(衛尉主簿) 동정(同正)이며, 셋째 택(澤)은 내시부(內侍部)에 들어와 잡직서 승(雜職署丞)이며, 넷째인 항(沆)은 상주목(尙州牧)의 사록(司錄)으로 서기(書記)를 겸한 위위주부(衛尉主簿)이다. 점(漸)이하 세 아들은 모두 진사(進士)로서 등제( 登第)하여 세상에 현달(顯達)하니 옛 사람이 이르기를「덕이있는 사람은 마땅히 뒤끝이 아름답다」하더니 참으로 거짓이 아니로다. 이제 평생의 사적(事蹟)으로서 시문을 삼거니와 다른 일은 비문과 행장(行狀)에 더욱 상세하다.

 

명(銘)에 이르되

이어 전하기는 쉬어도 처음 세우기는 어렵나니 아들 손자 번성한대 지나간 자취는 쓸슬하구려, 옛적에 들으니 곧고 미더우면 편안히 장수(長壽)한다고 하던데 이제 그 무엇이 그릇 되어 저승길로 향하는고. 슬프고 서러워서 눈물이 넘쳐 흐른다.

 

1105년(肅宗10년 乾統5) 10월 사문 응량이 돌에 씀.

 

지석(誌石) : 길이 이척(二尺) 폭 : 一척五촌(一尺五寸) 높이 : 三촌(三寸)

지석 발견은 무진(戊辰) 3월 14일 저녁이며, 지석 원본(原本) 인출(印出)일은

무진(戊辰) 3월 23일이다.

 

 

<원문>

 

 

朝散大夫檢校禮賓卿行攝大府卿으로 賜紫金魚袋하신 滎陽鄭公의 諱는 穆이요 無字이며 本은 東萊人이라 大父諱之遠은 爲郡長하고 父諱文 道는 或爲郡長이다 公이 十八歲에 辭親游學하여 辛勤奮志로 以克樹立하고 抵咸雍二年丙午에 擧中于成均하니 旣而오 名聞이 曄曄하여 與 少大蘇幹으로 병許齊名하니 時에 有志于場屋者가 翕然稱之러라 外舅인 檢校將作監 廣陵高公諱益恭이니 聞公之秀穎하고 良用惜之하더니 越咸雍七年辛亥에 以一女로 妻之하다 明年春에 聖考文宗이 親較士于廣殿할세 賜題曰止水鑑形의 詩와 仲尼爲百王師라는 賦하고 上이 先自親製是詩하니 有云하되 晝窺天子日이요 夜孕庶民星이러라 公이 與英모輩로 偕赴하야 此其進呈에 與御製로 一句가 相合하니 上이 尤 歎之하시고 賜公以丙第하여 尋拜秘書省校書郞同正하니 其預籍仕版이 顯達 文武百벽이 比比相面에 公이 一以和與諒으로 接之하여 不爲崖岸 참絶之行하니 卒莫與公으로 有猜忌者하고 其在族姓에도 亦罔間言하니 是는 皆公之所有樂易之性과 沈厚之德也라 越大康二年丙辰에 授以 軍器主簿로 通判高州하고 계政滿하여 携家造京하니 今相國인 魏公繼廷과 尹公瓘이 與公으로 雅好하여 有忘勢位之交하더니 自是로 公이 間詣幕府하면 必促席均禮하고 후후驩笑하여 以爲己眞知也云이라 公이 嘗誦自傳의 詩에 蟲全性命은 因無毒이요 木得天年은 爲不材之句 하여 以敎兒息하고 又以詩로 誡之云하되 爲言三四小兒童하노니 達己와 登朝는 路不同라 爲吏에 固遵房杜術이요 業儒에 終究孔姬風이라 在家必意皆成孝하고 報國無忘共盡忠하라 汝若依行余所訓하면 此生何必致羈窮가하다 越大康十年甲子에 出리永淸縣하니 其年에 海內가 旱하야 民이 無聊生하고 轉於溝壑者가 往往有之러라 公이 下車하고 旣不數月에 縣之西有德池原이라 火燎幾許里에 民이 始懼焉하드니 會 에 麥禾가 登熟하고 有裨不種하되 離離厥原할새 公이 因使人刈獲하여 得實五十餘石으로 以爲軍儲하고 或爲民所獲者는 又不知其幾러라 逮二年冬에 有大遼國의 封冊使副一行人이 來歸本朝할새 次宿縣之東迎德驛이어늘 公이 率縣寨吏하고 迎將焉할새 禮文이 尤縟하고 苞供館 侯가 又可佳者라 遼人이 有云하대 縣이 非永淸이요 卽榮城也라 하거늘 其時의 接伴이던 前相國邵公이 褒薦于朝하여 召拜直史館이나 有遺 愛政하여 抵今二十年間에 縣人의 有饋苞저者가 綿不絶焉하니 則羊公緖餘를 其可尙矣오 又烏知縣人이 不竪碑於峴首也리요 公이 修宣宗實 錄一卷하여 附于史典하고 其遺藁는 家有傳焉하다 越大安九年에 拜監察御史하니 其年春夏에 東民이 飢겸이어늘 宣宗이 命公하사 授爲春 夏番東北面兵馬判官甲仗別監하고 兼宣撫于高和, 長平, 寧仁, 興元, 現德, 靜邊, 凡七州하니 以穀米一千八百七十餘石과 醬鹽三百一十餘石 으로 以濟窮無告者凡九千九百九人하다 公이 言하되 余가 雖給以公儲나 實亦惠于斯民이 不少焉이라 하더니 未幾에 又拜殿中內給事하고 出守金州하니 厥受命初에 閭巷親舊가 有告言하여 曰某州에 在祀典之神이 凡幾百位라 威靈이 慘酷하여 致夭於人하니 每有刺史戾至에 例 不踰月하여 卽遭虐罰이라 하니 聞是語己에 妻노가 懼然하야 日夜로 皆憚其歸하대 公은 無變色하고 且曰神旣聰明正直하니 無所濫罰于人 하리니 니曹는 必無患哉인저 하더니 自下車로 比及三載에 無有黃熊과 臺태之崇하고 召拜左拾遺知制誥하니 此는 神이 所佑正直也가 必矣 라 累遷至殿中侍御史하니 公이 立朝에 無惰容하고 左右之佐에 以直誠從事하여 謹愼自規하니 其云爲操守가 卒無敗戾러라 越壽昌三年丁丑 에 又拜起居郞하니 其年秋에 今主上이 御宣政殿하고 親定海內罪名할새 命宰相近輔하여 進侍焉하니 公獨昻然하고 秉筆지上하여 直書君言 하니 是亦古所謂左史謹識之分也라 累遷하여 至刑部와 禮部侍郞하니 每受俸之日에 惠及內外親姻戚과 與閭巷賤小하더니 及除是官에 凡所 分賚가 三十五石이라 以是로 里人이 不敢有忽하고 감聚家戶하여 營爲佛事하고 燃燈路傍하여 以祈公之福壽하더라 越乾統五年春에 又拜三 品官이나 公身이 數年已來로 有疾不추하여 藥餌不絶이러니 及是年三月에 疾革하니 二子漸이 侍側에 有憂色이러니 公이 云하되 道之將行 도 命也歟며 道之將廢도 命也歟니 兒는 何憂焉고 하더니 五月乙卯에 卒于龍興寺하니 德海院하다 是月辛酉에 依佛制하여 火葬于寺之西崗 할새 其祖送전飾이 莫非如儀러라 庚午에 拾骨하여 假安于帝京東北의 安佛寺하고 又其年十月九日癸酉에 權知太史監侯인 郭子仁이卜宅兆 하여 來告吉하므로 甲申遲明에 歸葬于弘護寺西南原하니 春秋六十六이라 有子四人하니 長曰濟는 以吏術로 就任하여 卽今에 衛尉主簿로 通判靈光郡이요 次曰漸은 衛尉主簿同正이요 次曰澤은 入內侍하여 雜職署丞하고 季曰沆은 尙州牧司錄으로 兼掌書記인 衛尉主簿요 漸以下 三子는 병以進士登第하여 顯達于世하니 昔人이 有云하되 有其德者는 宜有後라하더니 眞不誣矣로다 遂以平生事로 誌之하니 餘在碑與行狀云이라 其銘에 曰 承傳之易요 創始之難이라 有嗣繁衍하고 肇蹟孤寒이라 昔聞貞諒은 善壽以安이라 하더니 今其何謬로 奄向幽關고 嗚乎己矣라 泣涕완瀾이로다.

 

1105년(肅宗10년 乾統5) 10월

沙門 膺亮 上石

誌石長二尺 廣一尺五寸 高三寸

誌石現年月日 戊辰三月十四日夕

誌石原本印出年月日戊辰三月二十三日

 

 

주(註)

 

一. 방두(房杜) :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로 당대(唐代)의 명신.

二. 공희(孔姬) : 공자(孔子)와 주공(周公)을 가리키는 말.

三. 황웅대태(黃熊臺태) : 황웅은 춘주좌전(春秋左傳)에서 사람에게 질병을주는 여귀(려鬼)를 말함이다.

 

 

장단선천비 번역문(長湍先阡碑飜譯文)

 

동래정씨는 안일호장 회문(繪文)으로 이름 쓰는 어른으로 시조를 삼고 보윤호장 이던 지원(之遠)으로 이름쓰던 어른을 一世祖로 한다. 보윤공이 안일호장이던 문도(文道)를 두어 묘소가 동래 화지산에 높직하다. 이 어른이 목(穆)으로 이름 쓰는 어른을 두니 이 어른이 비로소 벼슬이 현달하여 섭태부경(攝太府卿)에 이르 렀다. 배위(配位)인 고씨(高氏)는 검교장작감이던 익공(恭益)으로 이름쓰는 어른의 따님 이요. 상당군부인(上黨郡夫人)의 봉함을 받았으며, 아드님 제(濟)·점(漸)·택(澤)·항(沆) 네 분이 모두 급제했다. 둘째 아드님은 어사잡단(御史雜端)이고 셋째 아드님 은 문하급사중 찬선대부(門下給事中贊善大夫)이고 막내는 예부상서(禮部尙書)이고 시호가 문안공이니 이러한 사실은 모두 고려사 본전에 전해진다.

 

이 때로부터 우리 집안이 크게 떨쳐서 고려 후기에서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공경 대부가 줄을 이어서 나라를 위하여 애씀이 끊어지지 아니하여 모두 왕명(王明)의 복을 누리었다. 그들이 변란을 만나서 나라 위한 절의와 임금만을 돕고자 하는 매운 마음과 행실을 올바로 하고 학문을 쌓은 훌륭함이 줄기되고 가지되어 서로 얼비치어 빛나서 한결같이 모두 인후(仁厚)하고 경신(敬愼)했기 때문에 여러 대에 걸쳐 이루어진 가풍(家風)을 본받았음이오니 오직 선조께서 덕을 지극히 성하게 쌓아서 후손에게 물려 주시어 갈수록 더욱 커졌다고 할 것이다.

 

또 그 근원을 풍수설의 발복으로 미루어 화지산이 이 나라 안에서 가장 으뜸 되는 명당이라고 소문났지만 유독 태부공의 묘소가 실전되어 대대로 크게 안타 까워 하면서 백방으로 찾고자 애써도 찾지 못하고 그 곳이라고 찾으면 의심스럽고 의심스러워서 자세히 살펴보면 또 아니었다. 그러다가 믿을 만한 곳이 나타난 때가 또 5, 60년 될 즈음에 지하 유물(遺物)이 흔하게 나타났는데 개성과 장단이 더욱 심하더니 1928(戊辰)년에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상리 뒷산 중턱 에서 지석 하나가 나타났는데 거기서 公의 성과 이름과 조상의 관향과 벼슬한 이력과 자손들과 돌아가시고 장사지낸 날짜까지 실려 있었다. 처음에는 견(甄)씨로 성을 쓰는 다른 고을 사람이 자주 여기를 찾아와서 산골짜기를 기웃거리 더니 이 해 4월 14일 저녁에 상리에 와서 그 마을의 이씨와 김씨와 함께 산에 올라가 옛 무덤가를 파서 석판(石板) 하나를 얻으니 앞뒤로 글씨가 새겨졌는데 견씨가 가지고 갔다.

 

견씨는 그것이 다만 묘지석인 줄만 알았고 이씨와 김씨는 글자를 살펴서 동래정씨 조상의 것인 줄 알았으므로 그 말이 새어 나왔다. 곧 가까이 사는 후손 경(鏡 :난암공 종손)이 이 사실을 듣고 달려가서 그 지석을 보고 와서 멀리 살거나 가까이 사는 일가들에게 알렸다. 이 때에 후손 덕영(悳永)과 세진(世鎭), 우흥(雨興)이 달려가서 지석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는데 지석이 나타난 일과 나타난 자리가 어디인지를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서 확인했다. 그리고 무덤에 가서 조심스럽게 광중(壙中 :시체를 묻는 구덩이)을 살피니 장사지낼 그 당시에는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했으므로 남은 것이라곤 재한줌 쯤이 있어서 따로 관(棺)을 맞추어 봉안하고 옛 둘랫돌로 바깥을 쌓았다. 지석은 본디 돌을 쌓은 안쪽의 왼편 곁에 자리가 있었으나 지금에는 안쪽이 좁아서 지석을 묻을 수가 없으므로 자리를 옮겨 돌을 쌓은 바깥의 앞쪽에 놓았다. 그리한 다음 흙을 덮어 봉분을 쌓고 나니 오월 초하루였으니 지석이 나타난 때로부터 스무날이 채 안되었다.

 

삼가 지석에 나타난 글을 헤아리니 公은 1040(高麗 靖宗)년 생으로 1066(文宗 丙午)년에 성균시에 입격(入格)하고 1072(壬子)년에 전시(殿試)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가서 비서성 교서랑동정(秘書省校書郞同正)과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지내고 고주(高州)의 통판(通判)이 되고 돌아와서 또 영청현의 수령으로 나갔다가 직사관(直史館)으로 임명되었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감찰어사에 제수되었는데 마침 그 해에 흉년이 들어 춘하번 동북면병마판관(春夏番 東北面兵馬判官)에 고주·화주·장평·영인·흥원·현덕·정변의 선무사(宣撫使)를 겸하여 제수되었고 임무를 마치고 내직으로 들어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었다가 김주자사(金州刺使)로 나갔고 돌아와 좌습유(左拾遺)와 지제고(知制誥)에 임명되었고 여러번 자리를 옮겨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와 기거랑(起居郞)과 형부와 예부의 시랑(侍郞)이 되니 품계가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이르고 벼슬이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 섭태부경(攝太府卿)이 되어 자금어대(紫金魚袋)가 하사되었으며 춘추 66세로 1105(肅宗乙酉)년 5월 19일에 별세하여 그 해 10월 20일 갑신일에 여기에 안장했다. 이것이 公의 관력과 돌아가시고 장사지낸 줄거리이다.

 

公이 18세에 어버이 곁을 떠나 매우 애쓰고 노력하여 뜻을 굳게한 보람으로 급제하여 벼슬살이하면서 문무관원들에게 한결같이 고르게 대접하여 모가 나서 불화하는 일이 없었으며 마침내 公을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문숙공 윤관(尹瓘)과 충렬공 위계정(魏繼廷)과는 나이와 지위를 뛰어넘어 더욱 잘 사귀었다. 성실과 정직으로 공무를 처리하고 삼가고 조신(操身)하니 영청의 수령일 적에 고을 백성들을 돌보았으므로 그곳을 떠나 온 때가 수십 년이 지났으되 문안(問安)하는 그 고을 사람들이 이어졌고 일곱 고을을 선무(宣撫)할 때 관곡(官穀)과 장(醬)과 소금을 내놓아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한 수효가 일만인이었고 평소에도 봉급이 들어오면 내외 친인척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늘 어엿삐 여겨 나누어 주었다.

 

일찍부터 백거이(號낙천)의 시를 늘 즐겨서 외웠으니,

 

蟲全性命因無毒(충전성명인무독), 木得千年爲不材(목득천년위부재)

「벌레가 목숨을 온전히 한 것은 독이 없기 때문이요,

나무가 고목이 되도록 오래 사는 것은 재목이 못된 탓이라」라는 구절이요.

 

또 당신이 시를 지어서

 

爲言三四小兒童(위언삼사소아동), 達己登朝路不同(달기등조로부동),

爲吏固遵房杜術(위이고준방두술), 業儒終究孔姬風(업유종구공희풍),

報國無忘共盡忠(보국무망공진충), 在家必意皆成孝(재가필의개성효),

汝若依行余所訓(여약의행여소훈), 此生何必致窮(차생하필치기궁)

 

「어린이를 위해서 내 이르노니,

잘되어 벼슬한다 해도 길이 다르리니 벼슬을 하면 진실로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가 정사(政事)하던 슬기를 따를 것이요,

남을 가르치려거든 공자(孔子)와 주공(周公)의 풍도를 터득하라,

집에서는 반드시 효도하려고 애를 쓰고,

나라의 은혜를 갚으려거든 충성을 다해야 됨을 잊지 말아라,

너희가 내 가르침대로 실행한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오」라고 했으니

이것은 公이 평소에 행하신 바의 대략이다.

 

이제 묘지석의 글에 나타난 바로써 이 어른의 모든 사적을 밝게 알 수가 있으니 八百여년이 지났어도 公을 곁에 모신 듯 기침소리 들리는 듯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니 이 일은 묘소를 다시 모신 일뿐만이 아니오. 또 우리 동래정씨 집안이 전래하는 인후경신(仁厚敬愼)으로 가법을 삼으니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이가 가득한 물그릇을 든 듯이 조심조심하는 데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에사 公의 행장(行狀)과 그 집안에서 가르친 바로써 살피건데 우리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제도와 그 기품의 겉으로 드러남이 모두 한결같이 公에게서 뿌리하였음을 알게 한다.

선조께서 자손을 도와 편안하게 함이 이와 같음인져!

 

대저 냇물의 흐름도 때에 따라 그 길이 달라지고 멧부리도 높고 큼이 때에 따라 달라지는데 하물며 엉크러진 실마리 같은 세상 일이야 얼마나 자주 바뀌 겠는가 마는 公만이 후세에 전하여 이어져서 널리 퍼지고 시들지 아니함은 公의 몸소 행하심이 이미 독실했고 이미 인정이 두터워 서로 엉키어 널리 퍼졌고 그 기운이 길이 후손에게 경복(慶福)으로 물려 주어졌기 때문이다. 성하도다 조상의 음덕(陰德)이 이에서 징험(徵驗)되었으니 조상과 후손은 같은 기맥(氣脈)이라. 비록 대수가 멀어 졌고 세월이 오래 흘렀어도 조상이 후손에게 내리심도 아름답고 조상의 물려주심을 받아들임도 기쁨을 느낄 만하지 아니한가? 조상의 덕을 추모하면서 은혜를 갚으면 예악(禮樂)이 흥성하게 일어나리라. 또 선조께서 베푸 심이 이와 같았으니 그리워 하면서도 나 스스로도 또한 선조의 뜻하심을 이어 받아 후세를 열어 가야 할 책임이 있다고 여겨서 언제나 삼가고 조심조심 한다면 비록 서투르더라도 이 일로 말미암아 더욱 두루 창성해질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이러함이 모두 公의 행적을 아는 데서 생기며, 우리는 그 행적을 깊이 알 수 있었는데 이는 또 公의 묘소를 찾은데 말미암은 것이다. 이 일은 선조께서 저승에서도 이끌어 주시고 그 묘소가 여기 있음을 알리는 그 근원을 나타내었 도다. 봄과 가을로 묘소 앞에서 제사 지낼 적에 엄숙하게 제수(祭需)를 차려 모시는 일은 선조께서 후손을 사랑하여 편안하게 해 주는 일을 고맙게 여김이니 영원토록 받들어 길이 이어지리라. 올 겨울에 묘앞에 비석을 세우려고 공론이 돌아서 후손 인보(寅普)에게 그 글을 지으라 하므로 인보는 그 사실을 삼가 서술(敍述)하고 또 이어서 명(銘)을 바치노니 그 명(銘)에 이르기를,

 

신라 옛 일을 살피건데 성인인 혁거세가 나타남에 육촌장이 하늘의 그 뜻을 이어받아 도왔도다. 이 때의 진지촌장이 우리 정씨의 조상이니 진한의 옛 땅에 하늘이 내린 복이로다. 벌써 오래도록 이어져서 바닷가인 동래에 그 복이 쌓였도다. 그 쌓임이 어떠한고 지령(地靈)의 도움이 쉼이 없도다. 아름답다 호장공이 그 자리는 낮았어도 공들여 북돋우고 가꾸면서 서두르지 아니했노니 태부공에 이르러 비로소 피어나서 영화로움이 우리에게 이르도록 멈추어지지 아니함은 선조의 베푸심이 많았음이로다. 베푸심이 많았으니 백성들도 굶주림을 잊었으며 이것은 선조께서 몹시 백성들을 가엾게 여겼음이므로 백성들도 길이 그 은혜를 그리워했음이로다. 땅처럼 인정이 두텁고 부드럽기는 봄 볕일러니 남을 사귐에 화락(和樂)하니 모두에게 흐뭇하게 했도다.

 

겸손한 그 아름다움이여, 무덤가에 저 빽빽히 들어선 나무들을 보게나, 삼가고 겸손하여 감히 그리워할 수 없는 듯 이 무덤가를 지키네, 은혜가 골고루 모든 이에게 미치고 그 이름이 널리 여러 사람 들의 가슴에 남았음은 이렇게 애써서 조심스러워 했음이로다.태부공의 덕이 저 천지(天池)처럼 높고 깊어서 온 물줄기가 그 흐름을 이어서 넉넉하게 적시고 줄어들지 아니했도다. 그것은 공이 욕심부리고 다투지 아니하여 밝고 맑음을 보존했음이로다.

 

태부공의 덕을 후손들이 본보기로 삼아서 나라의 주춧돌과 기둥처럼 중신(重臣)이 되고 사회의 원로가 되었도다. 교목세신(喬木世臣 :여러 代를 걸쳐 즐거움과 고난을 나라와 함께 하는 신하)이 조정에 있으니 온 나라 안이 기대어 의지해서 태평성세가 이어지고 모두들 산악처럼 우러르도다. 어쩌다가 나라가 어수선할 때면 곧은 절의와 굳은 충절로 맞서고 중신으로서 나라 돕는 깊은 마음에 도무지 나의 안위(安危)는 잊었도다. 유독 조심하고 조심해서 마침내 경사로움이 있었으니 그 붙어온 내력이야 실로 우리 태부공께서 비롯되었도다. 그 누가 벌써 오래된 적의 일이라고 하는고? 지금도 후손을 사랑하심이 이와 같지 아니하는고?

 

상리(上里)의 산이요 고장(庫藏)의 마을이로다. 여기 터 잡아 모시고 실전하여 지난 날에는 왜 그 자취를 몰랐던고? 오랜 세월이 지나고 온 세상에 아름답게 빛났도다. 어찌 그 지석이 이제야 나타나서 公의 자취를 밝힐 줄 알았으랴! 그 묘소를 밝혔을 뿐만 아니라 그 덕행(德行)도 함께 밝혔도다. 나무의 뿌리와 물의 근원도 밝히고 나면 틀림이 없나니 산에는 초목이 있고 들에는 사람이 살도다. 서성이며 우러러 쳐다보니 그 때인 듯하여 구름이 골짜기에서 피어나고 비가 언덕을 적시 듯이 뚜렷하도다. 햇빛이 따스함이 公이 나타나신 듯 곁에 모신 듯 하옵기에 넓직한 터전을 잡아 묘역을 다듬고자 계획했다. 부지런히 그 일을 했으나 걱정만 앞서고 마음이 급하여 미쳐 손쓰지 못했더니 이제 재사(齋舍)도 준공하고 묘소의 산도 벌써 사들였도다. 이 때가 1940(庚辰)년이니 태세(太歲)가 公이 탄생하신 때(1040庚辰)와 부합되도다. 이제 비석을 세우려 하니 어찌 명(銘)이 없고서야 될 법이나 한가? 이 묘소의 내력을 여기 밝혔으니 그 꽃다운 향기는 영원히 번지거라.

 

후손 인보(寅普) 삼가 지음

 

<원문>

 

 

東萊之女紀始安逸戶長諱繪文紀代自甫尹戶長諱之遠甫尹公生安逸戶長諱文道葬東萊華池山是生諱穆始以名位顯至攝太府卿配高氏檢校將作監諱益恭女封上黨郡夫人四子濟漸澤沆皆登科仲御史雜端叔門下給事中贊善大夫季禮部尙書諡文安事具麗史本傳自此大振自麗季以至我近世累公累卿勞繩繩受王明之福而其遇變之節敵愾之烈砥行績學之碩交輝幹枝一皆出於仁厚敬愼故家風式於遠邇惟先祖德至盛積而貽之用歷久滋而談者文推原堪輿孕育之吉華池山域中莫不聞獨太府公不傳世世以爲大感訪求無所不而猶不得焉其得焉而疑疑焉而考其斷缺審其近似以爲果然者亦且五六十年自頃地藏多出而開城長湍尤甚至戊辰誌出於長湍長道面上里後山中公姓諱先系鄕貫官歷事行子姓以至卒葬年月日皆在始有甄姓者異面人數行窺山谷是歲四月十四日夕來上里要里之李與金上山穴古壙得石板前後刻者甄負以視且告遠近宗族會後孫悳永後孫世鎭後孫雨興取誌還備問諸人以誌所出及穿穴始末己將諸人至于壙敬審壙中以當時用浮屠法故遺者僅與灰存乃別木奉之而仍用古石周爲外重誌故立石內左有處今內無以容則移就石外之和前然後反土而封以夫須寔五月朔日距誌發未二旬謹考誌文公以高麗靖宗庚辰生文宗丙午擧中成均壬子殿試賜第歷秘書省校書郞同正軍器主簿通判高州還又出爲永淸縣召拜直史館尋授監察御史會飢授春夏番東北面兵馬判官兼宣撫于高和長平寧仁興元現德靜邊入爲殿中內給事出守金州召拜左拾遺知制誥累遷殿中侍御史起居郞刑部禮部侍郞階至朝散大夫官至檢校禮賓卿攝太府卿賜紫金魚袋春秋六十六以肅宗乙酉五月十九日乙卯卒以十月二十日甲申此公官歷卒葬之槪而公十八辭家遊學辛勤奮志旣登朝文武一接以和不爲崖岸卒莫與公爲怨顧尤善尹文肅瓘魏忠烈繼廷誠直以從事謹愼以自守其在永淸有惠利旣去數十年而縣人間訊者不絶宣撫七州出官穀醬鹽以救窮無告者且萬人居平祿賜之入自內外親姻以至閭里賤小每有分恤嘗喜誦白樂天全性命因無毒木得天年爲不材之句又自爲詩曰爲言三四小兒童達己登朝路不同爲吏固遵房杜術業儒終究孔姬風在家必意皆成孝報國無忘其盡忠汝若依行余所訓此生何必致窮以敎諸子此又公生平事行之略也夫以先墓不傳之久而一朝而得其故藏無復疑則爲後裔者固無以加其今以誌文故乃幷得其一切之蹟去之八百餘歲而咳若何承焉斯則不止封之復奉而己且鄭氏傳仁厚敬愼以爲家法世謂奕而持盈由其然也而於今循觀公行及其所以敎於家者而知規模氣象乃一本於公先祖之燕翼後人有如是哉 今夫江之流也而有時而改山原之高大而有時而變人事萬端風會屢易而公所以垂之於後獨流衍不衰由公之在於身者旣篤旣厚篤厚之至融結薄其雖久且遠而錫焉而可使穀之受焉而可得肖之追遠報本禮樂可興又見先祖所以垂之如此而憬然思吾身亦有繼先開後之責日兢兢焉則雖由今彌昌可也凡此皆由於知公之蹟而能知其蹟則又由於得公之墓殆若先祖迪之於冥冥之中徵其墓示之淵 源春秋霜露之薦齊稷匡之實其將交邀寵綏而永嗣於百世矣今歲冬胥議刻石墓隧以詞命後孫寅普寅普敬述其事且纘以銘銘曰稽古斯盧聖人之興自天作輔六部是承厥惟珍支維鄭氏祖辰韓有緖爰篤厥祜旣久綿綿蓄祉海蓄之惟何祗敬不休翼翼戶長卑不可踰培之漑之勿勿徐爰太府乃始發之非榮我敭曰惟有施施則多矣民以忘飢惟玆惻愈永人思渾厚如地和如春接之熙熙用洽倫揖謝其美務居伊樸謹如不敢直而守谷歸惠于衆歸名于人勞此夙夜在得懼先太府之德如彼天池萬派承流甘潤無虧善利不爭保玆明淸太府之德後孫是型柱之石之蓍之龜之喬木在國上下有依昇平渾渾山嶽崇崇疾風或吹勁節危忠鐘鼎旅常僉忘我盛氣之所延永錫厥類盛矣不惟祖德斯徵於以感祖孫一氣惟其抑抑乃終有慶推本自來實我太府孰謂已遠于今有撫上里之山庫藏之村吉卜未傳在昔何湮歷世皇皇于北于南豈知貞石乃徵于今乃徵其封乃徵其德木本水源用徵不山有艸木野有屋廬徘徊瞻眺如熟自初雲出于谷雨濡于遠有陽載煦如著如存爰規恢域爰謀庇具有勤厥事艱而不措建齋旣訖買山旣成屬玆庚辰歲符公生有琢旣磨曷以無銘登詞紀塋永配芬馨

後孫 寅普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