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정씨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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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일호장공묘갈

복양공 묘지

 

안일호장공묘갈(安逸戶長公墓碣)

 

세상에서 씨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모두 동래정씨가 세가(世家)요 대성(大姓)이라 하고 풍수지리가는 또 화지산의 정묘(鄭墓)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명당자리라고들 한다. 대저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도록 천여 년 간을 봉분(封墳)이 뚜렷하며 제사를 받듬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자손이 길이 이어 번성하며 공경대부들이 국사와 족보에 찬란히 빛나고 있으니 그것은 모두가 이 무덤이 덕을 심은 보답에서 비롯되었 도다. 보게나! 뿌리가 깊어야 가지가 무성하고 냇물이 넉넉하면 멀리 흘러 가나니 이 어찌 그 근본이 없이 그렇게 될까 보냐!

 

무덤의 앞에 본디 나즈막한 빗돌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 되어 낡았으므로 1711년(肅宗37년 辛巳)에 20대손 감사 시선(監司是先)이 밀양부사일 때 돌을 깎아 비석을 고쳐 세우면서 그 뒤쪽에 간략하게 사적(事蹟)을 기록했는데 그 글을 살피니「公의 휘諱)는 문도(文道)이며, 무덤은 동래 화지산 정남향(正南向)이요, 윗 세대를 고증 할 문적(文籍)이 없더니, 효종 때(1656~1659년)경기도 장단 고을 송림산아래 옛 무덤이 허물어져 지석이 나타났는데 예부상서 문안공 정항(鄭沆)의 무덤 이라」새겨 있었다.

 

거기에「그 선조는 동래 인이고 아버지 휘(諱 ) 목(穆)은 섭대부경이며 할아버지 휘 문도(文道)와 증조부 휘 지원(之遠)은 모두 본군(本郡)의 호장(戶長)이라, 항(沆)은 23세인 고려 숙종 임오년(1102)에 과거에 급제하여 인종 병진(1136,紹興 6年)년에 별세하셨고 항은 형이 세 분인데 제(濟)는 일찍 돌아가시고 점(漸)과 택(澤)은 모두 문장과 재간으로써 조정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었다.」라고 했으니 公의 연대(年代)는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이 된다.

또한 그는 매우 조심성있고 부드럽고 무던하며 거짓없이 정성스러운 덕행과 겸손하고 공손하며 꾸밈없이 검소한 모습은 한 씨족의 시조되시고 후손들이 본받기에 충분하겠으나 전기(傳記)가 없어져서 전해지지 아니하고 다만 동래 군지(東萊郡誌)에「公이 현리(懸吏)로 있다 가 나이 많아 집에서 지낼 때마다 초하룻날에 나팔 부는 소리를 들으면 고을 원이 조회를 시작하는 줄 알고 문득 뜰에 내려가 엎드려 절을 했다.」고 하니 그 공손함이 이와 같았다.

 

또 그 군지(郡誌)에 의하면「公이 돌아가시어 장사지내려 할 때 상여가 이 화지산에 이르니 범이 쭈그리고 앉아 눈이 녹은 이상한 자리가 있으므로 거기에 장사지냈다.」라고 했고 이제껏 온 고을이 모두 정호장(鄭戶長)의 이름을 알고 있다 했으며 그 무덤을 가르켜 정묘(鄭墓) 라고 부르며 동네 아이들이나 나무꾼이 들어가지 아니하니 무덤 가의 나무들이 무성하게 잘자라고 지역이 남쪽의 바닷가에 있어 여러 차례 난리를 겪었지만 이 곳이 침노당하지 아니했으니, 이 어찌 公이 덕을 베풀고 선행을 두터이 한 까닭이 아닐까 보냐! 족보를 펴 보면 公의 손자가 네 분인데 시랑 제(侍郞濟)와 어사잡단 점(御史雜端漸)은 자손이 전하지 아니하고 항(沆)은 곧 묘지문(墓誌文) 의 문안공을 이르는데 또한 자손이 전하지 아니하며 오직 문하첨의 찬성사 급사중인 택(澤)이 고려조에 유명하여 인종 11년 계축(1133년 9 월)에 예빈소경으로 사신이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 온 것이 고려사에 실려 있다.

 

公의 자손은 찬성공 택에 이르러 더욱 창성하여 자못 전 국에 두루 퍼져 살고 대대로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나타나 왕실을 돕고 나라를 위하여 세록지신(世祿之臣:대대로 나라의 녹봉을 받는 신하 )이 된 자가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대저, 거짓 없이 삼가는 것(忠謹)으로 근본을 삼았으니 그 끼친 메아리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았으므로 세상사람들이 이것을 정씨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풍이라고 한다.

 

언섭(彦燮)이 대(代)를 이은 나라의 은혜와 조상의 음덕(蔭德)을 입어 이 고을을 다스리는 동래부사가 되어 성묘를 하니 한 기운으로 번져 나오는 느낌을 가누지 못하겠기로 문중의 어른인 밀양부사 혁선과 함께 가까운 고을에서 수령(守令)을 지내는 종친들에게 알려 그 봉급에서 거출하게 하여 위토(位土)를 더 마련하고 또 이 고을 일족들이 무덤 앞에 모여서 종계(宗契)를 조직하 여 종족 간에 화목하고 선대의 무덤을 수호하기로 다짐하였다.

그래도 오랜 세월이 지나면 언덕과 골짜기도 달라지고 묘표(墓表)의 기록도 알아보기 어려울까 두려워서 무덤 앞 남쪽 여남은 걸음 쯤에 다시 돌을 깎아 세우고 묘갈을 기록한다. 내용은 묘표의 뒤쪽 기록(陰記) 전문 (全文)과 또 동래군지(郡誌)에 실린 글 중에서 후세에 증거가 됨 직한 것으로 묘표의 뒤쪽 글에 빠진 것을 간략하게 더 보태어 기록한다.

 

또 무덤 앞의 석물(石物)이 너무 간소하여 고쳐 세워야 마땅하나 감히 하나하나 새롭게 더 하지 아니하는 것은 겉치레만 아름답게 꾸미다 가 충후(忠厚)하고 질검(質儉)한 유덕(遺德)에 손상될까 두려워함이로다 .

 

무릇 이 무덤의 후손되는 이들아! 어찌 선조의 음덕을 흐리게 하고 가풍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높은 산이 깎이고 닳아 숫돌이 되고 깊은 바다가 마르고 줄어 개울이 되도록 뒷사람들이 여기 와서 이 글을 읽기를 공손히 두 손 맞잡고 바라노라.

 

1732년(崇禎甲申後 89년 壬子 英祖 8년)에

22대손 통정대부(通政大夫) 동래부사 언섭(彦燮)은 경서(敬書)한다.

 

<원문>

 

 

世之譚氏族者가 皆以東萊之鄭으로 爲世家大姓하고 堪輿家-又以華池鄭墓로 爲東國名墓云하니 盖自勝國으로 逮于 我朝히 千有餘年之間에 封域이 宛然하고 香火-不絶하며 子孫이 愈久綿昌하야 累公累卿하야 國史와 家譜에 爛燁相望하니 其始-皆出於此墓의 種德之報也라 噫라 根深則枝茂하고 川豊則流遠하나니 此는 豈無所本而然哉아 墓前에 舊有短碑이러니 歲久殘缺이어늘 我肅宗大王二十七年辛巳에 二十代孫 監司是先이 爲密陽府使時에 伐石改竪하고 략記其陰하니 謹按其記에 曰公의 諱는 文道-니 爲鄭氏始祖니라 葬在東萊華池山子坐原하고 而 其上世는 無文可徵이러니 至我 孝宗大王時하야 長湍松林山下에 有古墓-毁而幽誌가 出하니 乃禮部尙書文安公鄭沆墓也라 有曰其先은 東萊 人이니 考의 諱는 穆이니 攝大府卿이오 祖의 諱는 文道요 曾祖의 諱는 之遠이니 皆爲本郡戶長이라 沆의 年이 二十三인 高麗肅宗壬午에 登 科하여 卒于 仁宗丙辰하니 卽宋之紹興六年이라 沆의 三兄에 濟는 早卒하고 漸과 澤은 皆以文章과 材幹으로 有名于朝云-라 嗚呼 라 公之年 代를 此可槪見이 而獨其謹厚忠懿之德과 謙恭質儉之風이 宜其爲人家肇始之祖이며 爲後世子孫之法者-로되 闕而無傳이라 郡志에 曰 公이 以縣吏로 老而家居할세 每月朔에 聞吹角聲하면 則以爲官長開衙이라하야 輒下庭拜伏하니 其恭이 如此러라 郡志에 又曰公이 沒而葬也라 行喪이 至于此山할새 適有雪消虎路之異故로 就而葬之云하니 至今鄕里家巷이 皆知鄭戶長之名하고 而指其墓曰鄭墓이러라 樵牧이 不入하 여 丘木이 無恙하고 地在南邊하야 선겁을 屢經이나 而亦不敢犯逼하니 豈非公之積德厚善이 有以致是也歟아 按譜컨데 公之孫이 四人이니 侍郞濟는 御史雜端 漸은 子孫이 無傳하고 沆은 卽幽誌에 所謂文安公也야니 子孫이 亦無傳하고 惟門下僉議贊成事給事中인 諱澤이 有名麗 朝하야 在仁宗時에 以禮賓少卿으로 奉使如金하니 事載麗史라 公之子孫이 至贊成公하야 尤益昌大하야 至于今殆遍一國하고 代出名公碩卿 하야 輔佐王室하야 爲國世臣者를 不可盡錄이라 大率以忠謹으로 爲法하야 其流風餘韻이 尙今不衰하니 世稱鄭氏世傳之家範云이러라 彦燮 이 世受國恩에 獲蒙先蔭하야 來守玆土할새 瞻掃塋域에 不勝一氣流通之感하야 遂與宗長密陽府使赫先으로 通告於姓族之爲傍近邑宰者하야 各割官俸하야 增置祭田하고 又與此鄕同宗으로 修계於墓下하야 以爲收宗族하여 護丘墓之圖할새 尙懼夫過此千百世之後에 陵谷이 易變하 고 表記가 難認일까하야 卽墓階之南十步許에 治石而碣之하고 記文은 則盡用表陰全文하고 又以郡志所載로 徵信於後世호대 見漏於表陰者 를 略爲添錄하고 至若墓前石儀-太近簡樸하야 宜在修改者를 亦不敢一增新하야 以取觀美者는 恐傷忠厚質儉之遺德也-로라 凡爲此墓之子孫 者-其 敢有荒墜先德하야 違棄家風者乎아 噫라 湧山이 如砥하고 蓬海如瀆토록 拱手以사後人來讀云爾로다.

崇禎甲申後八十九年壬子에 二十二代孫 通政大夫東萊府使 彦燮 敬書함